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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돈 잘 벌던 사장님이 조합원으로 “쓴맛 봐도 우린 달고나”

최고관리자 1 411 03.07 10:47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6>협동조합 달고나 만든 김정훈


프로듀서 출신의 요리사 김정훈 협동조합 달고나의 이사장.

상수동의 잘 나가던 비스트로 달고나를 협동조합으로 바꾸자는 건 그의 아이디어였다. 홍인기 기자



자영업을 하면? 돈이 남거나, 사람이 남거나, 둘 다 잃거나, 둘 다 얻거나. 넷 중 하나 일 거다. 통계는 둘 다 잃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귀띔한다.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4분의 1이 자영업자라는데, 그마저도 70%가 연 매출 1억원이 안 되는 영세업자라는 수치를 보면 말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서 돈도 벌고 사람도 얻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일을 벌인 사람이 있다. 사장의 지위를 버리고 협동조합이란 공동체의 일원을 자처한 김정훈(48) ‘협동조합 달고나’ 이사장이다.

그는 16년여 전만 해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던 영상기자이자, 프로듀서였다. 2000년대 초 6㎜ 캠코더의 출시로 시작된 ‘1인 미디어 시대’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2001년 출입기자실의 폐쇄적인 운영을 고발한 ‘인천공항 출입금지기자실 사태’, 사상 최초의 국민참여경선이자 ‘노무현 신화’의 서막인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전국 순회 경선이 대표적이다. 지금이야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는 중심의 언론이 크게 관심 갖지 않은 현장들이었다. 의원 시절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직후 첫 인터뷰 풀 버전 영상 테이프는 아직도 그의 서고에 있다.

현장의 열기를 느끼며 살던 그는 2008 3월 훌쩍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탈리아로. 온라인에 송출하는 몇 분짜리 영상은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니었다. 진짜 내 작품으로 내 삶을 살아보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가보자는 생각이 그를 이끌었다. “일을 할 때도 주말이면 친구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해먹고,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어요. 그렇다면 이 즐겨하는 요리를 하며 살 수 있는 식당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탈리아를 택한 건 막연한 이유에서였지만,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 유명한 영국의 셰프 제이미 올리버도 이탈리아로 요리 여행을 갔다는데, 이 나라는 그럼 정말 ‘맛의 성지’인가 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그는 요리학원이 아닌 생의 터전을 교습소로 삼았다. 이탈리아에서 배울 것은 요리 기술이 아닌 삶과 문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함께 간 강수연(달고나 조합원)의 표현을 빌리면, ‘이탈리아의 기운을 쐬고 오자’는 거였죠.

1 1개월 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빌릴 수 있는 대로 돈을 끌어모아 4,000만원 남짓의 소자본으로 서울 상수역 인근에 ‘비스트로(요리와 와인을 파는 작은 식당) 달고나’를 열었다. 10년 전 상수동은 지금의 상수동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도 따라 식당은 잘됐다. 돈이 벌리기 시작할 무렵, 그러나 그는 돈의 확장이 아닌 쉼의 연장을 선택했다. 2년 차에 시작한 주5일 영업은 지금까지 달고나가 고수하는 원칙이다. 그가 손으로 삐뚤삐뚤 적어 붙인 ‘노동시간을 줄여야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주장을 인용한 장기 휴가 공지문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단골들은 달고나를 ‘개념식당’이라고 부른다.

그저 현상 유지만 하고자 했으면 더 큰돈을 벌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3년 전 달고나를 협동조합으로 바꿨다. 쉽게 말하면 공동경영의 형태다. 파격적인 시도다. 그래서 위기도 겪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바닥을 쳤지만, 그래도 이것이 지속 가능한 길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그에게 달고나는 개인 사업장이 아닌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망원동 복지마트 자리로 터를 옮긴 달고나의 휴무일에 그를 만났다. 자영업 10년에 인테리어 공사 정도는 ‘뚝딱’이라는 그가, 페인트 자국이 멋스럽게 묻은 후드 티셔츠를 입고 앞에 와 앉았다.


◇잘 벌릴 때 영업일 줄여 쉬는 날 늘였다


그는 한 때 6㎜ 카메라를 들고 주요 방송사들이 찾지 않는 현장을 기록하는 PD였다.
그 일을 접고 이탈리아로 떠나게 만든 건 ‘다른 삶을 살아 보자’는 모험심이었다. 홍인기 기자


-매주 월, 화는 쉰다고요. 5일제는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상수동 시절부터요. 식당을 막 시작했던 2009년엔 뭣 모르던 때니까 처음엔 주 6일 영업을 했어요. 그런데 하루 쉬는 건 쉬는 게 아니더라고요. 워낙 일이 힘드니까 문 닫는 날은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짜 쉬어야 했죠. 여가가 아니었어요. 이러다 ‘일 기계’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개업 2년 차 무렵부터 주 5일 영업을 하기 시작했죠.


- 5일을 해도 수익이 나던가요?

“주 6일을 하면 월급을 10, 20만원 더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 대가로 한 달에 고작 4일을 쉬면서 일을 하는 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또 다행히 단골 손님들이 우리의 그런 태도를 지지해줬죠. ‘이 식당은 지켜줘야 해’ 같은. 그런 손님들의 애정 덕분에, 5일을 하면 수치상으로는 매출이 떨어져야 하는데 실제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죠.


-원래 직업은 PD였죠?

2000년에 영상에 관심 있는 친구 3명과 ‘미동(美動)’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죠. 처음에는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물론 민간기업이나 관공서의 홍보영상 제작 같은 생계형 사업도 하면서요. 그러다가 대안매체로 급속히 뜨기 시작한 ‘오마이뉴스’와 손을 잡고 영상취재를 하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외주업체였죠. 격동의 시기였으니까, 그 덕분에 흥미진진한 현장에 많이 다녔죠.


-온라인 미디어가 태동하던 때였으니까요.

“맞아요. 마침 90년대 후반 일본의 소니사에서 내놓은 6㎜ 카메라 덕분에 지상파 방송사의 ENG 카메라가 없어도 누구나 고화질의 영상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죠. 돌이켜보면, 지금 ‘유튜브 시대’에 버금가는 미디어 혁명이 일던 시기네요. 오마이뉴스가 주목 받게 된 현장에 미동도 있었죠. 대부분 기성 언론이 찾지 않는 현장이었어요.


-애초 맘 먹었던 길은 아니지만, 나름의 보람이 있었겠네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 기록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보도할 수 있었고, 반응도 댓글로 바로 오니까 짜릿했죠. 요즘 말하는 ‘인생샷’도 건졌네요. 전직 북파공작원(HID)들이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 현장이었죠. 가스통에 불을 붙여가면서 과격하게 시위를 했어요. 그때 카메라를 들고 불길 아래서 시위대와 경찰특공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사진기자가 찍은 거였어요. 하하. 그랬던 시절이죠.

그는 아직도 그 시절 찍은 영상 테이프 1,500여 개를 보관하고 있다. 저작권도 그에게 있다. “앞으로 살면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그 자료들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30대에 가장 빛났던 시기의 작업물이지만, 사회적인 가치도 있는 자료니까요.


-그런데 왜 그만 뒀어요?

“한편으로 회의감이 들었죠.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그래야 하는데, 그 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 그는 2008년 인생의 변곡점을 찍었다.

(미동 멤버였던) 강수연과 ‘뭔가 우리 다른 삶을 선택해보자’고 했죠. 주말이면 우리는 늘 살던 오피스텔에 친구들 불러서 요리를 해서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식당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PD 일 접고 가진 돈 털어 이탈리아로


자영업 10년 해보니, 웬만한 인테리어 업자 수준의 부수적인 능력도 키웠다는 김정훈씨.
그의 옷에 묻은 흰색 페인트 자국은 그 증거다. 홍인기 기자

-그래서 이탈리아로 떠난 거군요. 왜 이탈리아였어요?

“철저하게 계산하고 간 건 아니에요. 식당을 하려고 맘 먹고 책도 찾아보고 주위 식당도 보니 이탈리아 요릿집이 많더라고요. 유명한 셰프들도 이탈리아를 많이 가기도 하고. 그래서 ‘아, 이탈리아가 맛의 성지’구나 싶었죠. 그런데 실제 이탈리아에서 산 건 13개월 중 후반 7개월 정도예요.

-그 전에는요?

“이탈리아와 가까운 지중해의 섬 몰타에서 살았어요. 영어를 먼저 배우려고요. 몰타가 한 때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어를 쓰거든요. 이탈리아와 가깝다는 장점도 있었고요. 영어 배우기에는 여러모로 가성비가 좋은 나라였죠. 영어는 마스터하지 못했지만, 수영은 내가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됐죠. (중략)

Comments

최고관리자 03.18 17:48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눈물을 멈춰야 한다.
http://www.kepico.org/bbs/board.php?bo_table=notice&wr_id=9